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문단 편집) == 논란 == [[인종차별]] 발언을 곧잘 했다. 미국처럼 남미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은 진보와 문명을 앞세워 원주민 학살에 앞장서 왔는데, 보르헤스도 그 맥락을 잇는건지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라고 부르면서 옹호하였다.[[http://books.google.co.kr/books?id=HS_rlyC8y8sC&pg=PA230&dq=The+language+of+the+land+borges&hl=ko&sa=X&ei=hamzT4rdEIibiQeY4t3jCA&ved=0CDMQ6AEwAQ#v=onepage&q&f=false|참고 페이지]] 평론가 호세 미겔 에르난데스는 "그의 문학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의 원주민 문제발언은 나치가 하는 헛소리처럼 무시할 가치만 있다"라고 쓴 소릴 했는데, 에르난데스 같은 경우가 되려 당시, 아니 지금도 남미에서 소수라라고 할 수 있겠다.[* 중남미에서 "히스패닉" 분류를 완전히 제외하고 인구조사를 할 경우, 스스로를 [[백인]] 아니면 [[흑인]]으로 생각하는 이들로 가득하고 자신을 원주민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원주민 혈통을 짙게 가지고 있으나 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페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나 이는 페루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과거 [[잉카 제국]]의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아이마라인들도 잉카 제국 영향력에 포섭당했을 뿐 (강제로 짓밟히기만 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전부터 독립된 왕국이 있었다.]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보르헤스를 '''세계의 불의는 이야기해도 자기 나라 불의는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라고 깠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놀라운 섬세함과 날카로운 이지로 "수치의 세계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나라의 수치에 대해서는 묻지조차 않는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불의 기억』. 박병규 역. 도서출판 따님, 2005. P.152-153>] 인종차별적 발언 뿐만 아니라 위의 피노체트 건만 해도 그렇고, 이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 문학계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내전]]의 참화를 겪고, 냉전 치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군사 독재자들 아래에서 고생하던 시기라 문학계에서 좌파의 세가 강성했던 시절에 혼자 우파적 행보를 걸어서 정치적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일단 본인 나름대로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고, 위의 인종차별적 발언과는 별개로 독일의 영향을 받은 아르헨티나 내의 [[반유대주의]]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카탈루냐-아르헨티나 사회학자인 마르틴 사그레라가 지적하듯이 나치나 파시즘 같은 "남의 인종주의"를 비난한다고 해서 본인이 인종주의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백인의 통합을 방해해서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데 지장을 준다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후안 페론을 군사 쿠데타로 축출한 군사 독재 정권도 옹호했으나, 조만간 권위주의적 정권이라고 지지를 철회한, 일종의 귀족적 성향과 뚜렷한 원칙을 가진 우파의 모두까기 인형이다. 그런데 이런 소위 말하는 귀족적 인생관 위에 형성 된 독고다이식 우파적 자유주의와, 여기서 비롯된 양비론적인 태도는 당장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 미겔 에르난데스의 옥사를 보고 자라 [[파블로 네루다]]의 독살을 겪은[* 공식 사인은 암으로 인한 심정지이다. 그러나 독살 가능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 20세기 대서양 양쪽을 할퀴어 놓은 이념 대립의 용광로 복판에 있었던 스페인어권 문학계 내에서 옹호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얼마나 안 좋았냐면 심지어 스페인 본토에서 좌파적 경향과 거리를 둔 걸로 알려진 [[미겔 데 우나무노]]도 발언 잘못 했다가 (반 프랑코적인 내용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필리핀 혁명가 [[호세 리잘]] 찬양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호세 리잘 찬양이라고 해도 문제였던게 그와 말싸움을 벌인 프랑코 오른팔 호세 미얀-아스트라이는 필리핀 독립운동 진압자 (...)였다. 상대를 잘못 고른 셈.) 린치 당할 뻔하고 심장병으로 돌연사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스페인 예술계는 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편인데 보르헤스가 얼마나 고깝게 보였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이런 정치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 연인 관계였던 여성 번역가이자 문필가 에스텔라 칸토와의 관계도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보르헤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깔고 있는 기계적 세계관이 인간의 자유와 의지가 아닌 국가의 통제를 숭상하는 공산주의의 폭압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평생 견지한 반면 칸토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